'역사/지리'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5.12.16 먼나라 이웃나라 - 1권 일본·일본인 편 (이원복)
  2. 2015.12.15 역사 연표 정리 - 타임라인
  3. 2015.12.15 일본 역사 간단 정리
  4. 2012.02.16 베트남
  5. 2012.02.15 라오스
  6. 2012.02.10 타이
  7. 2012.02.09 미얀마(버마)
  8. 2012.02.08 동남아 11개국 개관

1. 일본, 일본인 -한국과 너무 다른 나라


와(和)의 문화 --> 밖으로 개성표출이 어려워 내면으로 파고듬 --> 팬<마니아<오타쿠(오宅)

이치닌마에(一人前) --> 전체 사회내에서의 한사람의 몫(의무)

메이와쿠 めいわく[迷惑]: 귀찮음; 성가심; 괴로움; 폐

기쿠바리 きくばり[気配り]: 배려(配慮); 여러모로 마음을 두루 씀

혼네 ほんね[本音]: 본음색(音色); 전하여,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

  vs. 

다테마에 たてまえ[建て前·立て前]: (표면상의) 방침; 원칙.(↔ほんね)

온(은혜)와 오카에시: おかえし[お返し·御返し]: 답례; 답례품.(=返礼),회신(回信), 거스름(돈)

야사시이やさしい[優しい]: 온순하다; (마음씨가) 곱다; 상냥하다; 다정하다 --> 싹싹하고 나긋나긋한 문화


2.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일본의 7가지 성공이유


1) 성공비결 1 -세계최고 품질의 상품

2) 성공비결 2 -근검, 절약, 저축하는 국민

3) 성공비결 3 -엘리트 관료

4) 성공비결 4 -규격제품 대량생산

5) 성공비결 5 -삼인일각

6) 성공비결 6 -회사는 가정이다!

7) 성공비결 7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

8) 그러나 시대가 변하였다.


3.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일본의 7가지 고민


1) 일본의 고민 1 -세계 최고의 품질, 그러나 비용이 너무 든다

2) 일본의 고민 2 -저축하는 국민, 그러나 돈이 돌지 않는다

3) 일본의 고민 3 -엘리트 관료, 그러나 기업의 발목을 잡는 관료주의

4) 일본의 고민 4 -규격제품 대량생산, 그러나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시대

5) 일본의 고민 5 -정·경·관의 밀착, 그러나 부정·부패의 고리가 되었다

6) 일본의 고민 6 -회사는 가정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이 경직되었다

7) 일본의 고민 7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 그러나 창의력이 약하다


4. 일본은 어디로 가는가? -제2의 개국을 앞두고


1) 일본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나라

2)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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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만년전-AD 300년: 구석기 죠몬시대, 야요이 시대

*AD 300-710년 : 마토(大和) 시대, 고훈(古墳), 스카(飛鳥)시대 

*AD 710-794년: 라(奈良)시대 

*AD 794-1185년:이안(平安)시대 

*AD 1185-1333년: 마쿠라(鎌倉)시대 

*AD 1333-1573년: 난호쿠쬬(南北朝)시대,로마찌(室町)시대, 

*AD 1491-1568년: 젠코쿠(全國)시대 

*AD 1568-1600년: 아쯔지모모야마(安士桃山)시대 

*AD 1600-1869년 : 도(江戶)시대 

*AD 1868-1912년: 이지(明治)시대 

*AD 1912-1926년: 이쇼(大正)시대 

*AD 1926-1989년: 화(昭和)시대 

*AD 1989-2011년 현재: 이세이(平成)시대 


야! 나 헤~, 가무에 메다 쇼헤! 





300-710년

 마토(大和) 시대

최초의 통일국가

聖德(しょうとく)태자: 최초헌법17개조 --> 와(和)강조

아스카 (飛鳥)문화

 

710-794년

 라(奈良)시대 

 

 

794-1185년

 이안(平安)시대 

 

 

1185-1333년

 마쿠라(鎌倉)시대

 

 

1333-1573년

 로마찌(室町)시대

 

 

1491-1568년

 젠코쿠(全國)시대 


 

1568-1600년

 아쯔지모모야마

(安士桃山)시대 

織田信長(おだのぶなが) 

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

 

1600-1869년

 도(江戶)시대 

德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

1854 개항 by (미)페리제독

 

1868-1912년

 이지(明治)시대 

 

 

1912-1926년

 이쇼(大正)시대 

 

 

1926-1989년

 화(昭和)시대   
1989-현재 이세이(平成)시대   

 



일본의 기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일본 열도가 이자나끼와 이지나미는 부부이자 남매인 두 신의 포옹으로 생겨났다고 전하고 있다. 가장 먼저 흡혈아가 태아났고 두 번째로 일련의 섬이 탄생하여 일본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두 신은 그 후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낳았는데, 이 여신의 손자가 일본 땅에 내려와 일본 제1대 천황이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역사적 사실 여부는 논란이 많으며 최근의 역사 연구에 의하면 일본의 원주민은 약 10만년전 아이누족의 조상인 원시 인류가 동부 시베리아로부터 지금이 사할린에서 일본 북부지방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아이누족은 한반도로부터 온 새로운 이주자들에게 쫓겨 현재 북쪽 홋카이도(北海道)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3) 조몽 문화와 야요이 문화


일본 열도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에 대해서는 현재 진위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신석기 시대의 고고학적인 유물에는 조몽(새끼줄) 무늬 토기가 많아 조몬 시대라 한다. 기원전 3세기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서 벼농사 기술과 청동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문화가 북큐슈 지방으로 전래되어 야요이 문화를 발전시켰다.


4) 야마토(大和) 시대 - 고분 시대


야요이 시대 후반부터 기타큐슈(北九州)와 깅끼(近畿) 지방에 각각 정치와 문화의 중심 세력이 있었는데, 차츰 깅끼 지방 세력이 강해져서 4세기 말부터 중앙 정치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이것을 야마토(大和) 정권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큰 고분을 만들었는데 닌토쿠(仁德)천황릉은 480미터 길이의 거대한 규모이다. 일본 왕들이 신으로부터 하사 받았다고 믿고 있는 청동검, 청동거울, 곡옥 등의 수많은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자연 숭배를 기반으로 하는 다신교인 신토(神道) 신앙을 성립시켰다.


야마도 정권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의 우수한 문화를 도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학문과 기술이 뛰어난 한반도 사람들을 많이 초빙하였는데 이들을 도래인이라고 한다. 신라계 도래인 하타(秦)씨는 오사카 제방을 쌓으며 축제술을 전했으며, 고구려계 도래인 고마(高麗)씨는 교토(京都) 분지를 개척하였고, 백제계 도래인 야마토노아야(東漢)씨는 나라(奈良) 분지 남부에서, 카와찌노아야(西文)씨는 오사카(大阪) 남서부에서 각각 큰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때 여러 가지 선진 기술들이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7세기에는 쇼토쿠 태자가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 고대 불교 문화인 아스카 (飛鳥)문화를 꽃피웠다. 쇼토쿠 태자에 의해 만들어진 절로 호류사가 유명하다.


5) 나라 시대(710-794) - 중국을 본떠 만든 수도


710년 나라 지방에 헤이조(平城)가 완성되어 처음으로 항구적인 수도를 세워졌는데 이 시대는 비록 75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귀족 문화가 발달했고, 역사편찬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다. 나라 시대 중엽에 유행했던 노래를 모은 책인 '만엽집'이 만들어진 시대이다. '일본'이란 국호가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천황의 세력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의 후원하에 나라는 문화적으로 융성했다.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한 후 일본 왕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신들을 바다 건너로 보냈으며 중국에서 서적들과 학문, 철학과 종교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 중국의 수도인 「장안」의 광경과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한 일본인들은 자신의 첫 수도인 나라를 중국의 수도 장안(長安)을 본보기로 하여 설계하였다.


6)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 예술과 향락의 시대


침체되어가는 경제와 군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794년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겨 헤이안(平安)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 역시 중국을 모방해 세워졌다. 헤이안(平安)시대는 궁정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귀족들은 화려한 저택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작고 은둔된 사회에서 고전 일본 미술의 시대를 이루었으며, 중요한 시집들과 문학 일기들이 이 시기에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한문을 간소화하여 만든 일본 문자 '가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어의 딱딱한 문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어체의 일본어로 쓰인 헤이안 문학에서 여성들은 혁멱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헤이안 문학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산문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는 1000년 경에 무라사키 시키부라고 하는 황후의 시녀에 의해 쓰인 것으로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설도 있다. 이 때부터 여성들은 12겹으로 된 기모노를 입었는데, 색깔과 무늬에 따라 계층과 계절, 상황을 나타내었다.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닿도록 길렀으며 태양을 보지 않았고 병풍과 가리개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였다. 헤이안시대 말(末) 수도와 궁정이 예술과 향락추구에 여념이 없을 사이 천황의 권위는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호전적인 사무라이가 힘을 드러내게 되었다.


7) 가마쿠라 시대(1185-1333) - 가미가제의 기원


가마쿠라 지방에 쇼군 중심의 정부인 바쿠후(幕府)가 세워지면서 일본은 국왕 중심의 고대 시대에서 무사 중심의 봉건 제도가 확립되는 중세 시대로 넘어갔다.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확립된 것이 바로 이 때부터이다. 사무라이는 섬기는 사람(侍)을 의미한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쇼군)이 되면서 주군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개인의 윤리로 확립되었다. 사무라이는 그의 칼로써 주군을 섬겼으며 전쟁의 신(神)인 하치마 뿐만 아니아 검에 대해서도 숭배했다. 명예를 보존하는 방법으로써 의식적으로 자살하는 관습인 할복자살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다.


이 시대에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일어난 몽고 세력이 큐슈의 해안을 공격하였는데, 가마쿠라 막부의 지배 하의 사무라이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선을 두 번씩이나 난파시킨 살인적인 태풍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태풍을 가미가제(信風) 즉 신의바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 말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가 창설되면서 다시 유행하였다.


이 시대부터 일본의 역사는 천황과 쇼군(쇼軍 )의 자리다툼으로 이어진다. 1332년 고다이고 천황은 천황의 직접통치를 복원하려 했고, 강력한 군대의 저지와 무사들의 배반으로 막부 정치는 전복되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귀족과 승려들만 보호하고 무사 계급은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다이고 천황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장군들은 그에게 수도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 


8) 무로마치 시대 (1338-1573) - 다도 유행 


고다이고를 지지하기 위해 가라쿠마를 공격했다가 결국 고다이고를 추방하게 된 아쉬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열린다. 그는 56년간의 무정부 상태 동안 교토에 굳힌힘을 계속해서 유지하러 했으나, 향락에 몰두하고 개인적인 이득만을 추구한 장군들이 행정을 장악해버렸다. 무로마치 시대에 교토에서 꽃을 피운 예술은 오늘날 남아 있는 일본 전통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중국과의 교역으로 도자기가 들어왔다.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불교의 승려들이 최초로 관습화한 마시기는 이 시대에 와서는 그것과 관련된 예술품들과 차(茶), 다기( 茶器)들이 숭배되는 문화를 낳았다. 차노유라고 불리는 다도는 그 후 일본인들의 취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막부 통치자인 요시마사 장군이 교외의 은신처에서 다도를 즐기고 있는 동안에 세력을 재규합한 또 다른 무리인 오인워가 교토의 거리를 휩쓸었다. 10년 동안의 싸움은 대규모의 파괴와 무질서를 낳았다. 이 혼돈의 시대에 3명의 장군인 「오다 노부다가」, 「도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들의 활동으로 일본은 단일 정부로 통합되었다. 처음에는 동맹자였지만 「오다노부나가」가 싸움에서 승리해 다른 두 세력의 가문을 이끌었다.


9)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1568-1598)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노부나가는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의 시종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그의 사령관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물질적으로 풍족했으며 자신의 고상한 취미를 과시하려 했다. 그는 다도(茶道)의 대가인 센노리코의 후원자였는데 센노리코는 다도의 심미적인 간소함을 강조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통 금으로 치장된 다실을 원했다. 금으로 치장된 다실은 나고야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앙 집권화된 봉건사회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칙령 중 하나는 농부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사무라이들도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사무라이들은 소작농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검(劍)은 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중세의 다이묘(大名; 세력 있는 토지 소유자)에 대한 소작농의 반란 가능성을 감소시켰다. 그는 중국을 정벌한다는 핑계로 1592년과 1597년 두차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0) 에도(江戶) 시대(1603-1867)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왕국을 짓기 위해 일생을 보내다가 유능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로 죽었다.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로 하여금 5명의 보좌를 받아 통지하였으나, 때를 기다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강력한 후원 세력을 얻어 1600년 세키가와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12년 동안 기다리던 패권의 꿈을 이루었다. 다음 해에 그는 다른 다이묘들에게 새로운 군부 정권에 충성을맹세하도록 강요했으며 다이묘들 사이의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봉토를 임의적으로 배당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치하던 25년간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막부 정치는 에도(현재의 도쿄)에 자리잡았는데 에도(江戶)에서는 사(사무라이), 농(농부), 공(기능공), 상(상인)의 4계를 엄격히 조절하는 강력한 행정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회질서는 국가 강령으로 자리잡은 신유교주의의 철학으로부터 나왔다. 막부 정권은 다이묘들이 반년 동안 에도의 소유지에서 살게 하고 또한 그들의 가족들도 그곳에서 일년 내내 인질로 남게 하는 교대시중 체제를 만들어 다이묘들을 실제적으로 통제했다.


기독교를 추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선박의 크기를 규제하며, 해외에 나가거나 들어오는 일본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처형해 일본과 세계와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도쿠가와 시대에 일본이 결코 변하지 않는 채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평화는 번영을 의미했으며, 고대 시중 체제는 상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역설적이게도 맨 하층 계급인 상인에 의해 상업적인 제국이 세워졌으며 그 중 여러 가계(家系)는 오늘날도 남아있다. 미쓰이 회사는 17세기말에 에도 최초의 옷장사로 출발했다. 반면 사회의 최고 계급인 사무라이는 싸울 전쟁도 없는 군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동안 상업적인 도시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연극(가부키), 문학, 음악, 미술의 대중 문화가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11)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 - 변화와 실험의 시대


1853년 미국 선박의 선장인 코모도르 페리는 우라가만에 닻을 내리고 일본에 교역항을 열 것을 요구했다. 막부 정권은 재정상의 궁핍과 약한 군사력 때문에 외국인들을 격퇴할 수 없었으므로 이를 허가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불평등 조약에 조인했다. 결국 권좌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가 다른 사무라이의 반란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3년 미·일 화친조약과 1858년 영국, 러시아, 네델란드,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1866년 막부 세력이 패배하고 다음 해에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제도가 철폐되고 문벌이 아니라 능력 본위로 구성되는 근대적 정부 기구가 세워졌다. 수도는 에도로 옮겨져 도쿄로 이름 붙여졌고 메이지(明治)천황의 통치로 군주 정치가 복구되었다. 그러나 그의 배후에서 정치적 혁명을 주도한 이전의 사무라이 무리들은 정부를 움직이는 세력이 되었다. 다시 2년 안에 사무라이 계층은 몰락하고 다이묘가 토지를 다시 소유하게 되었다. 항구(港口)들은 열강들에게 열려졌으며 일본 전역에서 유럽화 경향이 일어났다. 메이지 시대는 한마디로 열광적인 변화와 실험의 시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이카라라고 말을 생기게 한 서양 양복을 입으며 정부의 정책을 따랐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제, 세법 개정 등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서양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관주도적 일방적인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주력하였다. 이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통일 국가를 수립했고, 경제적으로는 근대 자본주의를 성립시켰다. 정치적으로는 입헌 정치가 시작되었고 사회, 문화적으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실마리를 얻어 해외 팽창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895년 청일전쟁 결과 대만을, 1905년 러일 전쟁 결과 사할린 남부 절반을 점령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1910년에 한국을 합병했다.


12) 다이쇼(大正) 시대(1912-1923) - 요시히도 일왕


메이지 천황은 1912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요시히토는 메이지와 같은 카리스마적 성격을 가지지 못한 채 24년간 군림했으나 정치와 공적인 업무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말년에는 정신병과 각종 질환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군부는 계속해서 군대 팽창 정치를 밀고 나갔고 일본 내에서는 잠시나마 의회 정치와 자유주의의 물결이 일어났다. 요란한 20대 젊은이들은 재즈를 듣고 찰리 채플린과 마르크스를 숭배하기도 했으며 또한, 커피숍의 전신인 우유홀에서 우유와 와플(Waffle)을 즐기기도 했다.


13) 쇼와(昭和) 시대(1926-1989) - 히로히토(裕仁)일왕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은 아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더 깊은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2년 만주가 일본의 군사 규칙하에 보호국이 되었고 군사 침략 때문에 유럽의 비난을 받게되자 다음 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 특히,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이 터진 1937년을 기점으로 군부는 점차 정부를 장악해 갔다. 마침내 1941녀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연합군에게 항복한 일본은 경제 규모가 메이지 초기 시대의 수준으로 줄어 들었고 다음 해 신년에 천황은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는 라디오 방송을 전국에 내보냈다. 새로운 연합군의 지시하에 쓰여졌고 1952년까지 점령상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한국과 가까운 일본에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다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부터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시작한 일본은 다른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일본 경제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을 유치한 이후 산업의 발전은 탄력을 붙여 서양에서 모방한 여러 제조업과 첨단 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하여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으며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있다.


14) 헤이세이(平成) 시대(1989- ) - 아키히토(明仁) 일왕


1989년 요시히토 천황의 사망 후 아키히토가 천황에 올라 헤이세이 시대가 열렸다. 요시히토 이후 천황에서 실질적 권한은 없었지만 , 천황은 여전히 상징적인 원수이자 국민의 정신적 통합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있다. 현재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 연호인 平成(2004年 현재, 平成 15年)이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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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歷史 (김수연) 출처:  


1. 先土器(せんどき) 시대 


유라시아 대륙에 살고 있던 코끼리나 매머드 등의 화석이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십만 년 전, 빙하기의 일본열도는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6년(昭和 21년) 郡馬縣(ぐんまけん), 岩宿(いわじゅく) 등에서 깎아내어 만든 단면의 층에서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가 발견되어 수십만 년 정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아직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先土器시대라 한다. 


2. ?文(じょうもん) 시대 


약 1만 년 전에 빙하시대가 끝나자 점차 기후가 따뜻해졌다.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지각 변동도 있어, 일본열도는 대륙에서 떨어졌다. 지금 형태로 된 것은 1만 년 전부터이다. 지금부터 1만 년 전부터 약 2300년(기원전 3세기) 전까지의 시대를 말하는데, 그것은 새끼줄 무늬의 토기가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시대 이름이 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신석기시대다. 이 무렵의 사람들은 집단생활을 하였고,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기도 하고 물고기나 조개를 잡기도 하고 나무의 열매 등을 따서 생활하는 채집 경제를 이루었다. 특히, 수렵 기술이 크게 진보해서 석기는 날카로운 칼을 가진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빈부의 차가 없었으며 주술이 매우 발달했다. 


3. ?生(やよい) 시대 


기원전 3세기 경(지금부터 약 2300년 전),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 한반도로부터 北九州에 새로운 생산 기술이 들어온 것이다. 벼농사는 점차로 일본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의 수답은 낮은 습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은 지대로 옮겨서 살았다. 농업 생산 경제가 중심이 되자, 수답 만들기, 씨뿌리기 등으로 인해, 집단의 통합이 강해지고 부락이 형성됨과 동시에 생산력도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 사이에는 부와 힘의 차가 생겨서, 한동안 부락끼리의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의 평야, 하나의 분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부락을 합한 '국가'가 생겼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 작은 국가가 100여 개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던 국가가 30여 개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국가는 ひみこ라는 여왕이 다스린 邪馬台?(やまたいこく)였다. 이 시대에는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철기 등의 금속기도 대륙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붉은 빛을 띤 얇고 딱딱한 토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生土器(やよいどき)라고 한다. 그리고 토기의 이름을 따서 이 시대를 ?生시대라고 한다. 또, 이 시대에 농경생활에 수반하는 신앙, 의례, 풍속 등도 널리 퍼져서 일본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4. 大和(やまと) 시대 


 ?生시대에는 작은 나라가 많이 생겨났지만, 이 나라들은 아직 하나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4세기 초 무렵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든 큰 무덤이 생겨났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큰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고분이 있지만,前方後円墳(ぜんぽうこうえんふん)이 많고, 그 대부분이 奈良?과 大阪에 있다. 새로운 정치 지배자는 처음에는 大和라는 近畿(きんき)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그러나 점점 九州북부에서 중부지방까지 지배하게 되어서 '대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정치권력을 大和정권이라 한다. 이 정권을 후에 '朝廷'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왕은 작은 나라의 왕의 지위를 전과 같이 인정했다. 이들 왕들에게 大和정권의 뜻을 따르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大和대왕은 점차 서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은 대륙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철, 베 짜기, 금속공예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일본에 들어왔다. 또, 중국에서 생겨난 한자도 한반도로부터 들어와서 일본에서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5. 飛鳥(あすか) 시대 


 大和시대 말기에(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무렵), 중국 대륙에 강력하고 거대한 통일 국가가 생겨났다. 일본에도 이 영향을 받아서 중앙집권국가가 성립되었다. 6세기 말, 大和정권에서는 聖德(しょうとく)태자가 정치, 권력을 쥐게 되었다. 호족과 협력해서 대왕 중심의 정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대왕을 섬기는 호족의 각오를 나타낸 17조 헌법을 정했다. 또,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에 힘썼다. 聖德태자의 사후, 7세기 중엽에 대호족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가 성립되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정비했는데, 645년 처음으로 연호를 만들어 大化(たいか)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大和の改新(たいかのかいしん)이라 부른다. 이 새로운 제도에 의해 토지나 인민을 모두 대왕이 지배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왕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이 7세기 후반부터, 대왕 대신에 '천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다. 또, 중국 율령을 모방한 大?律令(たいほうりつりょう)이라는 법률이 만들어져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율령국가)가 성립되어, 전국 지배체제와 조세제도 등이 완성되었다. 권력이 있는 호족은 율령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에 의해서, 지위나 부를 자손에게 전해 주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는 계층이 생겨났던 것이다. 聖德태자는 불교를 깊게 믿어 불교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절이나 불상 등을 많이 만들어, 당시의 뛰어난 미술 공예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大和의 あすか를 중심으로 번영했기 때문에 あすか문화라고 한다. 


6. 奈良(なら) 시대 


국가 제도가 정비되어서 정치의 중심이 되는 수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수도를 모체로 해서 なら에 平城京(へいじょうきょう )라는 훌륭한 수도를 지었다. 平城京는 약 70년간 수도로 번창했는데, 이 시대를 奈良시대라고 한다. 奈良시대에는 大?律令을 기초로 해서 천황 중심의 정치(율령정치)가 실시되어, 수도는 번창하고, 귀족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농민은 노역 병역 등으로 생활이 점점 어렵게 되어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그 시점에서 조정은 새로운 토지를 개간한 사람에게 그 토지를 주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러자, 힘 있는 귀족이나 절과 신사에서 개간에 나서 자신들의 토지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는 그 후 더욱더 늘어나서 율령 정치의 근본인 공지공민제도가 무너져 조정의 정치도 문란해졌다. 이 시대에는 古事記(こじき)와 日本書紀(にほんしょき)]라는 2개의 역사책과 천황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지은 약 4,500수의 노래를 모은 万葉集(まんようしゅう)가 만들어졌다. 奈良시대의 문화는 天平(てんぴょう)라는 연호가 사용되었을 때 가장 번영하였기 때문에 天平文化(てんぴょうぶんか)라고 부르고 있다. 遣唐使(けんとうし)를 통하여 당의 문화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또 호국 종교로서 불교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天平文化는 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로 매우 화려했던 문화였다. 


7. 平安(へいあん) 시대 


794년에 수도를 교토로 옮긴 平安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 역시 중국을 모방해 세워졌다. 平安시대는 궁정 문화가 꽃을 피운 시대이기도 하다. 작고 운둔된 사회에서 고전 일본 미술의 시대를 이루었는데, 주요한 시집들과 문학 일기들이 이 시기에 쓰이기 시작했다. 중국어와 딱딱한 문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어체의 일본어로 쓰인 平安문학에서 여성들은 혁명적인 세력으로 등장했다. 平安문학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산문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겐지 이야기>는 1000년경에 むらさき式部(しきぶ)라고 하는 황후의 시녀에 의해 쓰인 것으로,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설도 있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12겹으로 된 기모노를 입었는데, 색깔과 무늬에 따라 계층과 계절, 상황을 나타내었다.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닿도록 길렀으며 태양을 보지 않았고 병풍과 가리개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였다. 平安 시대 말, 수도와 궁정이 예술과 향락 추구에 여념이 없을 사이 천황의 권위는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장원을 바탕으로 하는 호전적인 사무라이가 힘을 드러내게 되었다. 


8. 鎌倉(かまくら) 시대 


平氏를 무너뜨린 源?朝(みなもとのよりとも)는 鎌倉를 근거지로 정하고 무사정권(幕府)을 수립하였다(1192년). 이 鎌倉幕府는 약 14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鎌倉시대(1192-1333)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귀족(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토조정)과 무사(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鎌倉幕府)의 이중 정권이 있었다. 源?朝의 사후, 막부의 실권은 처의 생가로 옮겨졌다. 幕府는 承久の亂(じょうきゅうのらん)으로 힘을 강화했지만, 중국의 원이 공격해 온 元寇(げんこう)를 계기로 幕府에 불만을 가졌던 무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힘이 쇠퇴했다. 그래서 무사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천황은 幕府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1333년에 鎌倉幕府를 멸망시켰다. 전란이 계속된 불안한 세상에서 무사나 농민은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했기 때문에 새로운 불교가 잇달아 일어났다. 日蓮宗(にちれんしゅう)에 의한 이때의 불교는 귀족중심의 平安시대와는 달리, 이해하기 쉽고 실천을 중시한 것이었다. 鎌倉시대의 문화는 무사들의 세계를 반영한 것이 많아서, 무사들의 분쟁을 그린 軍記物語(ぐんきものがたり)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平家物語(へいけものがたり)이다. 또, 수필 方丈記(ほうじょうき)와 徒然草(つれづれぐさ)도 이 시대에 쓰인 걸작이다.    


9. 室町(むろまち) 시대 


 鎌倉를 무너뜨린 천황은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幕府를 무너뜨렸을 때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던 足利尊氏(あしかがたかうじ)가 반란을 일으켜, 京都의 室町에 幕府를 세워 정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막부를 室町幕府라 하고, 이 시대를 室町시대(1338-1573)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약 240년간 계속되었는데, 사회는 안정되지 않았다. 足利尊氏에게 권력을 빼앗긴 천황이 자신 정통 천황이라고 주장하는 한편(南朝), 京都에도 새로운 천황이 생겼다(北朝). 이 두 조정이 대립한 南北朝의 싸움이 5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392년 足利尊氏는 南朝와 北朝를 통일하여 14세기 말에는 전국을 지배하였다. 15세기 후반 막부와 守護大名(しゅごだいみょう)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서, 11년간 싸움이 이어졌는데 이를 應仁の亂(おうにんのらん)이라 한다. 그래서 幕府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이 무렵은 주인인 大名보다 家臣이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힘으로 밑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식의 일이 있었다. 다만 應仁の亂의 영향으로 家臣은 힘이 더욱 강해져서 각지에서 주인과 실력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00년간 계속된 이 시대를 ??(せんごく)시대라 한다. 실력으로 주인을 쓰러뜨리고 大名가 된 자를 ?國大名라고 하는데, ?國大名는 자신의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산업을 활성화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늘리기도 했다. 또 이 시대에는 상공업도 발달했고 각 지방의 특색 있는 특산품도 생산되게 되었다. 室町시대의 문화는 무사다운 것과 귀족다운 것이 융화되어 새로운 武家(ぶけ)문화를 완성했다. 또, 수도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문화가 생겨났다. 足利義滿(あしかがよしみち)가 京都의 北山에 세운 金閣(きんかく)와 足利義政(あしかがよしまさ)가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銀閣(ぎんかく)가 유명하다. 그리고 일본 전통공예인 能?(のうがく), 狂言(きょうげん), 일본인이 차를 즐기는 풍습도 이 室町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10. 安土桃山(あづちももやま) 시대 


 전국시대가 끝나고, 전국이 통일되어 織田信長(おだのぶなが)와 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가 정권을 잡은 시대를 安土桃山시대라고 한다. ?國大名의 織田信長의 전국통일의 꿈은 家臣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되자 무산되었는데 이를 本能寺の?(ほんのうじのへん)라고 한다. 織田信長의 뜻을 이어 받어 家臣인 豊臣秀吉에 의해 마침내 국내가 통일되었다. 그 후 豊臣秀吉는 조선과 중국에도 세력을 넓히기 위해 조선에 두 번 군대를 보냈지만, 두 번 모두 실패로 끝났는데 이것이 임진왜란이었다.  安土桃山시대는 호화롭고 웅대한 문화가 특징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으로, 安土桃山(あづちももやまじだい)라는 시대 이름도 信長(のぶなが)와 秀吉(ひでよし)의 거성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南?(なんばん)무역으로 여러 가지 서양문물이 들어왔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パン, ズボン, カステラ 등의 외래어는 당시 포르투칼에서 일본어가 된 것이다. 


11. 江戶(えど) 시대 


 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의 사후, 승패를 판가름한 關ケ原の?い(せきがはらのたたかい)」에서 이긴 德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가 1603년에 幕府를 江戶(지금의 東京)에 열었다. 이 후 260년간을 江戶시대라고 한다. 3대 장군 家光(いえみつ) 집권 시, 幕府의 조직과 參勤交代(さんきんこうだい)제도가 갖추어져, 幕府 체제의 안정기를 맞이했다. 막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네덜란드, 중국 이외의 나라와의 무역이나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펴서, 江戶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서민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는, 상업이 발달한 大阪의 町人(ちょうにん)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했으며, 井原西鶴(いはらさいかく), 近松門左偉門(ちかまつもんざえもん), 松尾芭蕉(まつあばしょう) 등이 활약했다. 이것을 元祿げんろく)문화라고 한다. 또 19세기 초에는 문화의 중심이 江?로 옮겨져서 소설, 歌舞伎, 浮世?(うきよえ) 등 다채로운 町人문화가 번영했다. 그러나 18세기경부터 幕府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외국 배가 일본 근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메리카의 페리 내항으로 의해 쇄국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개국했다. 개국 후 경제사정은 나빠지고 민중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薩摩(さつま)라는 지금의 鹿?島?(かごしまけん)과 長州(ちょうしゅう)라는 지금의 山口?(やまぐちけん)을 중심으로 한 幕府 타도운동이 고조되어, 마침내 15대 장군 德川慶喜(とくがわよしのぶ)가 1867년 大政奉還(たいせいほうかん)을 실행해, 江?幕府는 무너지고, 明治 신정부로 정권이 넘어갔다. 


12. 明治(めいじ) 시대 


 19세기 후반의 개국을 기회로 일본은 근대국가로 급성장했다. 신정부는 藩(はん)제도를 폐지하여 ?제도를 도입하고, 토지세개정, 징병령을 공포하는 등 정치, 사회,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明治헌법을 제정, 국회를 개설했다. 마침내 청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계기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明治문화는 전통문화와 구미문화가 대립, 통합 되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13. 大正(たいしょう), 昭和(しょうわ) 시대 


 大正시대로 들어서자 민주주의의 기운이 높아지고, 大正부터 昭和 초기에 걸쳐서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불황속에서 군국주의가 세력을 확장하여 昭和 초기인 1930년부터 15년간 전쟁에 돌입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본은 민주적이고 부강한 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전진했다. 그 결과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지금의 일본은 64년간 계속된 昭和가 끝나고 1989년에 平成(へいせい)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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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2세기 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음 --> 한자문화권
- 당나라시대때 안남(安南)으로 불림
- 베트남의 팽창 --> 남진
- 중국의 영향 --> 유교사상 --> 북부(찐[鄭]), 남부(응웬[阮])가문으로 분열 --> 응웬이 통일함
- 프랑스 --> 일본 --> 1945년 호찌민(하노이, 북부장악) --> 1975년 남부 사이공 함락
- 도이모이: 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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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박한 국토; 국토의 75%가 산악지대와 정글, 농경지3%, 메콩강 동쪽
- 식민통치자인 프랑스가 반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나라; 14세기부터 세워진 란상왕국이 19세기 초 타이와 베트남으로 병합되어 버림 -->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든후 타이로 부터 얻어낸 땅  
- 수도: 비엔티안, 옛수도: 루앙프라방
- 라오족은 타이족의 일파
      라오룸(=저지대 라오인 메콩강 유역 전체인구의 68%)
      라오퉁(구릉지대)
      라오숭(고산지대): 화전민
- 2차대전시 일본이 프랑스를 대신하여 지배함
- 2차대전후 프랑스가 다시 지배하려 하자 무장게릴라로 반발
- 1975년 베트남 공산화에 맞춰 공산화됨 --> 원조 중단됨
- 동남아의 교통, 물류의 허브가 되기 위하여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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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절대다수가 불교 --> 민족단결, 동질문화
- 국왕에게 절대복종
- 영국(미얀마, 말레이시아), 프랑스(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네덜란드(인도네시아)등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 공산화되지도 않았음 --> 그러나 60년간(1932~1992)의 군부독재 겪음(입헌군주제, 피분 송크람), 2차대전때는 일본에 순종
- 13세기말 수코타이 왕국
- 아유타야 왕국 (1350) --> 신분제도 --> 1767 버마와의 전쟁에서 패전 --> 아유타야왕국 멸망
- 차크리왕조 탄생 --> 방콕(끄룽텝; 천사의 도시)으로 천도, 국명: 시암 --> 라마5세: 영화 The King & I
- 1997년 외환위기
- 교통체증으로 악명, 방콕(끄룽텝; 천사의 도시)의 인구집중, 빈부격차
- 무에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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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양곤(옛: 랑군)의 아웅산국립묘지 폭탄테러사건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 70% 버마족, (목이 긴) 꺼인족, 샨족등 --> 민족갈등
버마족은 불교, 소수민족은 이슬람교 혹은 기독교

11~13세기의 바간제국: 황금시대 -->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
1767 타이의 아유타야왕국을 복속시킴
1886 영국에 합병됨 --> 영국은 인도인과 소수민족을 우대함 (버마인은 차별함) --> 버마인의 독립운동(버마족 중심, 반외세, 불교, 사회주의)
아웅산 --> 우누(U Nu)의 민주주의 (부정부패와 소수민족과의 내전으로 실패) --> 네윈(Ne Win)의 쿠데타와 쇄국 --> 소마웅장군의 군부구테타(1988) -->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치가 런던에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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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 방콕, 푸케
라오스 - 비엔티안
베트남 - 하노이
캄보디아(크메르루즈) - 프놈펜
말레이시아 -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 싱가포르
브루나이  반다르스리브가완
필리핀 - 마닐라

인도네시아 - 자카르타, 발리, 네덜란드 식민지
동티모르 - 딜리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sociation SE asian nations)

-네시아(nesia): "섬"을 의미함

미얀마, 타이, 라오스 --> 소승불교
베트남 --> 대승불교
말레지아, 인도네시아 --> 이슬람교
필리핀 --> 카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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